인상파의 특징과 현대성
아카데미즘과미술의 현대성
근대의식의 전개에 따라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프랑스의 정치적 변혁에서 그치지 않고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쳤는데, 미술도 이를 계기로 전환기를 맞았다. 바로 현대성(la modernite)의 큰 물결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성의 논란은 17세기 회화의 드로잉(데셍)이나 배색과 같은 미학적 논쟁 이상의 아카데미즘(살롱을 중심으로 한)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아카데미즘의 거장 부게로의 그림
19세기 전반 유럽 미술의 주류를 이룬 것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였는데, 뒤이은 시대의 자유·평등을 추구하는 현대의식은 자연 그 자체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며 현실의 시민생활에서 미술의 근원을 찾으려는 움직임을 낳았다.
코로·밀레·루소 등의 자연주의, 쿠르베의 사실주의, 도미에의 사회풍자적 표현으로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은 터너· 콘스터블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근대풍경화에서도 볼 수 있으나, 바르비종(Barbizon)파로 불리는 프랑스 화가들은 영국 화단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원의 정취를 그려내는 데 몰두했다.
현대 회화는 이상(l'ideal)이 아니라 지금 눈에 보이는 세계에 근거함으로써 당시의
윌리엄 부게로, 알렉상드로 카바넬 등의 이끄는 아카데미즘 회화와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
쿠르베는 현실을 직시, 그림에서 이상화나 미화를 배격하고 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기려 하였다.
그의 이런 현실 묘사정신은 19세기 말 이후에 유럽 화단의 기본이 된 근대 리얼리즘의 바탕이 되었다.
쿠르베,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19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미술은 미켈란젤로와 니콜라 푸생의 궁정이나 교회, 그리고 신화와 같은 미학 원칙의 되풀이 보다는 동시대의 삶에 뿌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또 그래야만 생생한 예술을 창조하고 보들레르가 [미학적 호기심, 1868]에서 정의하듯, 고전 예술의 경지를 높일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나는 천사를 본 일이 없다”고 말한 쿠르베의 사실주의 풍경화가 묘사한 대기(大氣)와 빛의 표현도 인상주의에 앞서는 것이다. 현대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가시적인 세계 밖의 그 어떤 것도 근거 대상으로 삼지 않고, 바로 이 점이 훗날 현대 회화가 성공하는 주 원인이 된다.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대한 '쿠르베의 선언'은 젊은 예술가들의 피를 들끊게 한다.
“민중에게 진정한 회화를 제시하고 그들에게 진실한 역사를 가르칠 목적으로 예술은
갱신되어야 한다...예술가들은 진실을 그리기 위해 현재 시간으로 열린 시선이 필요하다.
머리가 아니라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인상파가 태동하는 19세기 중엽 세계 미술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였고, 모든 화가들의 꿈은 관전(官展)인 살롱전(le Salon de Paris)에 작품을 출품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2년에 한번씩 열리다 나중에는 매년 열리게됐던 살롱전은 화가들이 자신을 세상에 알릴 수 있고 그림을 팔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중 하나였다.
하지만 워낙 신청자가 많다보니 출품을 위해서는 심사위원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고, 국립 미술 아카데미와 과거의 수상자들로 구성되는 심사위원들은 워낙 보수적이어서 전통을 벗어난 모든 새로운 시도를 배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네는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내놨다 보기좋게 거절당하고 만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살롱전 낙선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위해 그들에게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고, 1863년에 열린 '낙선자 전시회(le Salon des refuses)'가 그것이다. 세잔느와 피사로를 비롯한 미래의 인상파 화가들이 이 낙선자 전시회에 참가한다. <풀밭위의 점심식사>가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킨 것도 낙선자 전시회를 통해서이다.
‘새로운 회화수법’으로서의 근대적 표현의 첫 사례는 마네의 작품인 《풀밭위의 점심식사, 1863》《올림피아:Olympia, 1863》였다.
Le dejeuner sur l'herbe, 1863
Olympia [올랭피아] 1863
마네에 대한 혹평은 <올랭피아>에서 극에 달한다. 1867년 살롱전에 또 낙선한 마네의 그림들은 전위예술을 표방하는 젊은 화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차세대 화가들은 마네의 작품들 중 지난 6년동안 낙선된 것과 혹평을 받은 것들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흐름’, 바로 현대를 향한 물결‘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그림들은 화면의 밝음과 색채의 강한 대비, 대담한 색면(色面)의 배열, 누드의 현실성의 추구, 주제성의 무시로써 ‘현대성’을 진전시켰다. 인상파 그룹은 마네의 그 혁명적 내면에서 자극받았다.
바티뇰의 화실 (Batignolles)
1866년 이후 마네는 파리의 바티뇰 대로(Boulevard des Batignolles)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를 아지트로 삼는다. 여기에 모네와 르노아르, 바지유 등이 카페 게르부아로 모여들면서 아카데믹한 화풍과는 거리가 먼 이들은 ‘마네파’또는 ‘바티뇰 그룹’이라고 불렸다.
바지유 1870
마네의 친구였던 에드가 드가(Edgar Degas)도 이 그룹에 합류한다. 또한 인상파를 적극 옹호한 문학자가 에밀 졸라(Emile Zola)도 들어 온다. 그는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에 대한 혹평에 대해 옹호하는 글을 쓴 뒤, 신문사에서 쫓겨나는 불운을 겪었다. - 시대를 앞선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이제 대충 하나의 "파"를 구성할 인원은 거의 다 모였다고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싸울 일만 남았다.
누구랑? 살롱과 전통과 골수 보수와 싸워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갈...
그들은 마네의 카페에서, 바지유의 아틀리에에서 서로의 의견과 경험을 교환하고 같은 주제에 대해 공동작업을 통해 연합전선을 벌여 나간다.마네를 시작으로 종래의 미술에 반기를 들고,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파악하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색채의 미묘한 인상을 원색의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르느와르, Le Moulin de la Galette, 1876
마네의 밝은 색채에서 자극받은 인상파 그룹은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 없는 사물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태양 광선의 미묘한 조화를 쫓기 위해 이들은 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그래서 야외주의(플레네리즘 혹은 외광주의)를 만든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선은 빠른 필치와 붓놀림을 요구하고 빠레뜨에서 색을 섞기보다는 직접 화폭에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점묘수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망막적인 효과를 노린다.
모네 [Haystack. End of the Summer. Morning], 1891
자연에서 빛나는 밝은 색채와 광선의 변화에 따라 묘사하는 기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관심을 갖은 것이 시각세계이고 그 시각세계의 민주성은 근본적으로 [시각의 근본적인 혁신]의 핵심이 된다.
변화한 시각방식을 받쳐줄 색채학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발달은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마네·모네·드가·르누아르·피사로·시슬레·기요맹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인상파는 실물과 똑같이 그리려 한 객관적 회화에서 주관적 회화로의 일대전환을 가져왔고,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화법으로 혁명적인 참신성을 낳았으며 색채에 밝은 색감을 되찾았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노아르
이 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가장 큰 목표는 역시 살롱전에 출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네와 드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귀족 출신인 드가와 부유한 부르조아 가문의 마네(특히, 매번 떨어뜨려도 출품하는 성깔에 질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외에는 모두 보잘 것 없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살롱전 심사 기준에는 출신 성분도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었을 것이다.
특히 세잔느는 지나치게 튀는 스타일로 단 한번도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다.1870년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이 미래의 인상파 그룹은 해체를 맞이한다. 이 와중에 바지유는 2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뜬다.
이러한 준비없는 종말은, 그러나 위대한 성공의 싹을 이미 키우고 있었다.
바지유 La Toilette 1869-70
인상파, 그들만의 전시회 Expositions(1874-1886)
살롱전에 출품할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던 인상파 화가들은 드디어 스스로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열기로 마음먹는다. 이를 위해 드가와 피사로, 르노아르가 주축이 돼 1874년부터 1886년까지 모두 8번 열리게 된다.
드가 Racehorses in Front of the Grandstand, 1866-68,
그러나 마네는 동료들의 전시회에 한번도 참여를 하지않았다 그의 목적은 여전히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마네는 줄곧 자기를 거부한 살롱전의 문만 고집스럽게 두드렸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자신만의 그림’으로 그 단단한 성벽을 허물고자 했다. 마침내 마네는 1873년 <르 봉복>으로 성공을 거둔다. 마네 식의 모더니즘을 공식적으로 살롱전에 도입했다고 자평할 수 있다.
현대성의 회화기법의 또 다른 특징은 미완성(non finito)의 기법이다.
즉 자신들이 보는 것의 디테일을 분석하는 대신 전체적인 시각을 제시하였다.
모네와 인상파 화가들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삶의 전율을 감상자(즉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럼으로써 창작과 바라보기를 일치시킴으로써 감상자와 작품의 거리를 없앤다.
부연설명하자면,
고전주의가 정신의 재구성일 뿐인 “완성 기법”으로 고대의 소재를 이용하여 역사적인 거리감을 갖게 하듯, 그림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 냈다 (여성의 경우, 현실과 맞지 않는 신비스럽고 성스럽게 표현한다..그래서 체모가 없다)
쿠르베가 회화를 보는 관점과 소재 사이의 거리를 없앴다고 하면, 마네는 바로 소재와 기법사이의 거리를 소멸시킨다.
그럼으로써 작품은 예술가의 손에서 벗어나 감상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 또는 요구한다.
미완성 작품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와 비난은 살롱에서 상을 받는 이름난 화가들의 완벽한 기법에 대한 찬사와 경탄과는 상당한 대조를 보인다. “미완성 기법”의 미학적 차원에서 보면 화가의 “즉흥적 자발성(spontaneite)”속에서 드로잉과 같이 예술가의 창조적 자유분방함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회화에서의 이런 밝은 분위기는 고전에서 현대로 통하는 유럽회화의 기본이 되었다.
인상파의 새로운 회화는 색점(色點)의 병치(竝置)로 현실 시각을 분해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는데, 여기에서 G. 쇠라·P. 시냐크의 점묘파 즉, 신인상파가 나타나게 되었다.
인상파가 광선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얽매여 있었음에 대해 후기인상파는 표현해야 할 대상의 실체·본질을 가능한 한 단순한 형태와 색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후기인상파는 세잔· 고흐· 고갱· 툴루즈 로트렉에 의해 계승·발전되었는데, 이들은 해체된 자연의 재구성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화가 자신의 조형적 질서에 따른 재구성이었다.